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년)과 클라라(Clara Schumann, 1819-1896년)의 로맨스는 음악사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그 둘의 사랑이 슈만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낭만 음악사를 바꾸어 놓을 만한 명곡을 내 놓았기 때문일 겁니다. 슈만은 18세 때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법을 공부하러 라이프치히의 법대에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에는 관심이 없고 음악을 배워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라이프치히에서 유명한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년) 교수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처음 만난 클라라는 신동 피아니스트로 이미 유럽 연주 여행을 하고 있었고 불과 9세였습니다. 시골에서 무명으로 찾아와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슈만은 클라라를 매우 아꼈고 클라라 또한 슈만을 좋아하며 따랐다고 합니다. 클라라는 성장하면서 슈만이 옛날 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며 노는 것을 좋아했고 결혼 후에도 이런 일상들을 기록한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1935년, 슈만이 25세, 클라라가 16세 때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슈만은 에르네스티네라는 비크 교수의 제자를 사랑했는데, 결혼할 결심까지 하고는 에르네스티네의 고향인 Asch까지 내려가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거절당하면서 낙심한 채로 라이프치히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이 직후 클라라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1935년 말 클라라의 집 앞에서 둘의 첫 키스 장면을 클라라가 기록한 것으로 보면 이 때 처음 둘의 관계가 정립 된 것 같습니다. 슈만은 비크 교수가 자신을 천재로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이 클라라와 사귄다는 것을 환영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 반대로 클라라와의 관계를 슈만이 공포하자 비크 교수는 없었던 일로 하라며 저녁 식사 자리를 떠 버렸습니다.
이 때부터 둘 사이의 사랑은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비크 교수는 딸 클라라를 슈만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 라이프치히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로 연주 여행을 다니게 합니다. 비크 교수는 클라라가 2세 때 이혼을 하면서 어렵게 딸의 양육권을 얻어 음악가로 성장 시켰습니다. 자신의 음악적 커리어를 포기하고 딸에게 매달린 끝에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을 길러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크 교수는 클라라의 재정적 안정을 바랬고 클라라가 연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경제적인 버팀목이 될 수 있는 남편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슈만과 같이 정서적 불안을 가진 무명의, 무일푼 청년에게는 자신의 딸을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둘은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둘의 관계는 끝나가는 듯 했습니다.
1837년 클라라는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 Op.11 f#단조>를 자신의 라이프치히 독주회 프로그램으로 넣었습니다. 그리고 슈만에게 이를 알렸고 슈만은 아무도 모르게 청중 속에 섞여 이 곡을 감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대 뒤로 꽃다발을 보내면서 자신을 잊지 않았다면 답을 달라는 편지를 같이 넣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클라라는 그 동안 억제했던 사랑의 감정이 폭발해 버렸고 둘을 다시 이어졌습니다. 이후 둘은 수백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비크 교수 몰래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비크 교수는 이 둘의 관계를 알게되었고 1840년 이들이 결혼할 때 까지 슈만에게 호의적이었다가 적대적이었다를 반복하며 슈만의 애를 태웠습니다. 결국 비크 교수는 비엔나 법정에 슈만을 미성년자를 미혹한 정신병자, 알코올 중독자로 고소를 하게 되고, 이를 변호하기 위한 슈만의 긴 법정 싸움이 이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실제 슈만은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고 시가에 탐닉하였으며 음주를 지나치게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슈만은 결국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데 성공하였고 1840년은 클라라가 21세가 되는 해 9월 생일이 지나자마자, 비크 교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이로써 클라라는 아버지와 평생 화해하지 못하였고 폭군이었던 아버지를 떠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남편에게로 가게 된 셈입니다.
슈만에게 있어 클라라는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결혼 후에는 경제를 책임지는 든든한 아내였습니다. 슈만의 음악 속에는 클라라의 모티브나 클라라의 작품에서 따온 선율로 구성된 피아노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1830년대의 탄생된 슈만의 피아노 독주곡들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한 가장 수준 높은 걸작들로서, 클라라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타는 심정과 동경으로 인해 작곡된 것입니다. 1940년 결혼하게 되는 해는 슈만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 해였고, 120여곡이 넘는 예술 가곡 리트Lied를 쏟아냅니다. 이 해를 '가곡의 해'라고 칭하는 이유입니다. 피아니스트로서 상상해 보기를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을 못 했으면 계속 애절한 피아노 걸작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시점입니다. 이후 피아노 작품은 1830년대 만큼 예술적 경지에 오른 작품이 거의 없고 많이 작곡되지도 않았습니다.
결혼 후 클라라는 연주 활동을 엄청나게 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클라라는 뛰어난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이고, 연주가 자신의 사명이기도 했지만, 슈만은 작곡에 열중하였고 자신의 '음악신보'를 창간하여 편집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으나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클라라는 6명의 자녀를 낳으면서 만삭일 때에도 연주 여행을 다녔습니다. 당시 여성 작곡가, 피아니스트가 인정받지 못할 시기에 거의 최초의 전문 여성 음악가로서 입지를 세운 인물이 클라라입니다. 이는 클라라가 처한 환경도 한 몫 한 것일 겁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유튜브에 동영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방문 부탁드립니다. 브람스와의 관계는 동영상 2편에서 이어집니다.
www.youtube.com/watch?v=rJ8NMCqamCU
슈만이 마지막 부임지인 뒤셀도르프 음악감독으로 부임하고 나서 1853년, 20세의 브람스가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1번 C장조 Op.1>을 들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 슈만과 클라라를 찾아옵니다.
이 때가 슈만이 1854년 라인강에 투신하여 자살 미수 사건을 벌이기 불과 몇 달 전이었습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은 슈만은 감동하여 자신의 음악 신보에 '젊은 독수리'라는 극찬과 함께 브람스를 음악계에 데뷔시켰습니다. 브람스는 슈만 가족 옆에 기거하면서 지냈고, 몇 달이 지나 슈만의 자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슈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남은 클라라와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1856년 슈만이 사망하자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지만 클라라는 들어 주지 않았고 이후 브람스와는 평생의 음악적 동료이자 특별한 친구(?) 관계로 지내게 됩니다. 브람스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클라라 때문이었다고들 합니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사망하고 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땅에 묻었다'고 했으며, 몇 달 후 암 선고를 받았고 채 일년이 되지 않아 1897년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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